고대의 ‘배달’에 관한 이야기

From:금교Author: 2025-06-06 09:32

 최근, 징둥(京東)과 메이퇀(美團)이 배달 시장을 놓고 경쟁하면서 배달 산업이 큰 화제가 되고 있으며, 배달원들도 사회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배달은 현대인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비스로, 그 역사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漢)나라 시대의 포장 음식에서 송(宋)나라 시대의 번화한 거리의 전문 ‘한한(閑漢, 송나라의 배달원)’에 이르기까지, 고대의 배달은 중국 음식 문화의 변화를 목도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와 경제의 번영과 당시 시장 사람들의 삶과 활기를 반영하고 있다.

 <한서·왕망전(漢書·王莽傳)>에 따르면, 왕망(王莽)이 재위하는 동안 장안(長安)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재난민이 많았다. 왕망은 황문관(黃門官) 왕업(王業)에게 성내 백성의 생활 상황에 대해 문의하였고, 왕업은 성내에 기근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장에서 고기 국을 사서 왕망에게 바치며 이것이 일반 백성의 일상 식사라고 주장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은 한나라의 장안성 내에서 이미 상점들이 즉석에서 조리된 음식을 제공하고 있으며, 포장도 가능했음을 나타낸다.

 동한(東漢) 환제(桓帝) 시기에 중상시(中常侍) 당형(唐衡)의 동생 당현(唐玹)이 임명되었을 때, 경조윤(京兆尹)이 특별히 식사 시간에 술집에서 음식을 사서 대접한 것으로 보아, 배달이 이미 사회적 기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배달’은 주로 권력층을 위한 서비스였으며 일반 서민들은 이러한 서비스를 거의 누릴 수 없었다.

 당(唐)나라에 이르러, 시방제도(市坊製度, 주거지역과 상업지역은 엄격히 분리하여 통제하던 고대의 도시 관리제도)가 완화되고 사회 경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배달’ 서비스는 더욱 보편화되었으며 ‘립반(立辦)’과 ‘진사단(進士團)’과 같은 오늘날의 전문 배달 서비스 형태의 외식 서비스도 등장하였다. 당시의 ‘립반’은 신속하게 연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국사보(唐國史補)>에 따르면, 경조윤 오주(吳凑)가 임시로 연회를 준비했는데 고대의 연회는 비교적 번거롭고 복잡하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오주의 하인이 당시 ‘립반’을 이용하여 냄비, 그릇, 술잔을 가지고 동쪽과 서쪽 두 시장의 음식점에서 즉석 요리를 사와서 300~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연회를 신속하게 마련했다. ‘립반’과 유사한 전문 서비스로는 ‘진사단’이 있다. 이는 신임 진사를 위해 연회를 준비하는 서비스 팀이다. 팀원들은 빠른 연회 준비뿐만 아니라 각종 장소의 섭외와 임대, 여러 의례 절차의 처리 등의 전방위 서비스를 제공했다. ‘립반’과 ‘진사단’은 초기 ‘배달’의 원형이 되었다.

 그 후 송나라의 상품 경제가 전례 없이 번영하고 사회 생활이 점점 다양해짐에 따라 ‘배달’ 서비스가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 <동경몽화록·식점(東京夢華錄·食店)>에 따르면 “도시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여러 가지를 요구하며, 어떤 것은 뜨겁고 어떤 것은 차갑고, 어떤 것은 따뜻하며, 어떤 것은 극도로 차가워야 하며 어떤 사람들은 살코기를 요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비계가 얹힌 고기를 요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요구[소환(索喚)]하는 것이 다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의 ‘소환’은 ‘배달’을 지칭하는 것이다. 송나라의 ‘배달원’은 ‘한한’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종종 주점 근처를 배회하며, 누군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음식 주문, 배달, 사람 찾기 또는 편지 배달 등의 ‘심부름’이 필요한지 물어보곤 했다.

 송나라의 음식 문화는 매우 발달하여 다양한 음식이 끊임없이 등장하였고, ‘배달’ 서비스도 점차 귀족에서 일반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대해 <동경몽화록>에서는 “일반 서민의 집들은 종종 시장에서 음식을 사는 것 외에는 집에서 채소를 기르지 않습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로 인해 당시 많은 사람들, 특히 상인들이 스스로 요리하지 않고, 시장에서 즉석 음식을 구매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궁중의 진미에 익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식을 사랑한 송나리의 황제들도 ‘배달’ 서비스의 ‘열성 팬’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황제가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선소시식(宣索市食)’ 또는 ‘선환매시(宣喚買市)’라고 불렀다. 송고종(宋高宗)은 자주 시장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어 술집들이 요리 품질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고, 대충대충 음식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 이는 암묵적으로 임안(臨安, 남송의 도읍지)의 외식 전체 품질을 향상시킨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북송(北宋) 화가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가 변경(汴京, 허난성 카이펑의 옛 이름)의 ‘배달’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 속 한 가게 앞에서, 점원이 앞치마를 입고 오른손에는 젓가락을, 왼손에는 두 개의 식합(食盒, 음식을 담는 상자)을 들고, 두 눈은 반짝이며 마치 배달 장소를 급히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미지는 학자들에 의해 가장 초기의 ‘배달원’의 초상으로 여겨진다.

 명(明)나라와 청(清)나라에 이르러는 배달 서비스는 새로운 변화를 겪었다. ‘식합에 담은 요리(盒子菜)’가 유행하며, 구운 오리, 돼지고기 뒷다리 장조림, 훈제 고기 등 조리된 육류 제품이 층이 있는 식합에 담아 배달되었다. 고대 양주(揚州) 화방(畫舫, 아름답게 장식한 놀잇배) 문화는 ‘주문 요리’ 서비스를 더욱 촉진시켰는데 관광객들이 배 위에서 양안의 상점에서 정해진 시간에 음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고대에는 ‘배달’ 서비스 산업이 어떻게 발전했을까? ‘배달’ 서비스를 제공하는 음식점은 3가지 등급으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정점(正店)으로, 현재의 고급 레스토랑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소규모 배달 주문을 받지 않고, 왕실 귀족 연회만을 접수한다. 두 번째는 각점(腳店)으로, 현재의 중형 레스토랑과 유사하며, 조금 더 대중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음식점은 배달 시 최소 소비 금액이 설정되어 있어, 현재의 배달 가능 비용과 같다. 발점은 고대 ‘배달’ 소비의 주요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분영(分榮)으로, 현재의 작은 음식점에 해당하며, 한 그릇의 면요리나 몇 가지 볶음 요리를 배달할 수 있고, 가격이 저렴하여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많았다.

 고대에는 낙후된 교통수단으로 인해 음식이 배달되는 동안 식어버리면 어떻게 했을까? 이를 위해 지혜로운 고대 사람들은 당시 시대 상황에 맞는 ‘첨단 기술’을 개발했다. 음식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배달’을 할 때 온반(溫盤)을 사용했다. 이 도구는 위아래 두 개의 도자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위쪽 도자기는 얇았고 아래쪽 도자기는 두꺼웠으며, 중간은 비어 있었다. 사용할 때 온반의 중간 층에 뜨거운 물을 주입했는데 고대 버전의 ‘보온 박스’라고 할 수 있다. 원리가 같은 또 다른 그릇이 있는데, 이를 공명완(孔明碗)이라고 하며, 위아래 두 개의 그릇이 붙어 만들어졌으며 중간은비어 있었고 바깥쪽 그릇 바닥 중앙에 원형의 구멍이 있어 연결되어 있었다. 끓는 물이 중간 층에 들어가면 음식이 온도를 유지하게 되어, 현대의 일회용 도시락과 비닐봉지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식합은 고대에 음식을 담고 이동하기 편리한 장방형의 상자로, 재질은 대나무, 나무에서 법랑, 칠기 등으로 발전하였으며, 여러 겹으로 나누어 담아 요리의 맛이 섞이지 않도록 하였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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