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루(齊魯) 대지 위에 우뚝 솟은 기념비
2025-10-16 09:18:31 来源:금교
중화 민족의 극도로 힘든 항일전쟁이라는그림 속에서 치루 대지는 마치 우뚝 솟은 기념비와 같이 두려움 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대를 이어 용감히 앞으로 나아가는 수많은 영웅들의 영감한 업적을 새기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안에 담긴 강력한 정신적 힘에 감동을 받고 있다.
중추적 역량을 강화하다
산둥의 전략적 지위는 얼마나 중요한가? “산둥의 바둑판을 잘 살리면 전국의 바둑판도 살아나게 됩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평가는 산둥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산둥은 일본의 침략을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겪은 지역 중 하나이자, 중국 인민 항일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전장에서 중국 공산당은 늘 단결된 모습으로 항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전 민족의 항일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톈진(天津)-푸커우(浦口) 철도를 따라 남쪽을 침공했고, 국민당의 10만 군대는 짧은 전투 끝에 산둥의 영토와 인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 이 위기의 순간, 중국 공산당원들은 앞장서서 허베이·산둥변구(冀魯邊區), 톈푸산(天福山), 추라이산(徂徠山)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항일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수십 개의 항일 무장 부대를 결성하여 산둥 인민들의 구망도존(救亡圖存, 국가를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다)에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추라이산 봉기는 산둥성 당위원회가 직접 주도한 산둥 전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항일 무장 봉기였다.
전략적 대치 상태에 빠진 시기에 중국 공산당은 산둥의 군대와 인민들을 이끌고 불굴의 의지로 피를 흘리며 전투에 임함으로써 언제나 산둥 항일전쟁의 전진 방향을 주도했다. 산둥의 항일전쟁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38년에 ‘산둥에 군대를 파견한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1938년 12월, 산둥 각지의 항일 무장 세력은 전략적으로 일괄된 지휘를 받는 유격병단, 즉 팔로군 산둥종대로 재편되었다. 1939년 3월, 천광(陳光)과 뤄룽환(羅榮桓)은 팔로군 제115사단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산둥으로 진격하여 팔로군 산둥종대와 함께 싸워 루팡(陸房) 돌파전, 량산(梁山) 전멸전, 쑨쭈(孫祖) 매복전 등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41년 봄, 일본군과 괴뢰군의 ‘소탕’, ‘잠식’, 봉쇄 및 국민당 강경파의 협공 속에서도 산둥 당 조직은 항상 항전·단결·진보의 방침을 고수하여 성 전역의 항일 군대와 인민들을 이끌고 치열한 투쟁을 벌린 끝에 마침내 곤경에서 벗어나 전략적 반격의 나팔소리를 힘차게 울렸다.
1943년 7월 이후,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끄는 항일전쟁 군대와 인민들은 산둥 적 후방 전장에서 항일 전쟁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1944년 봄부터 1945년 여름까지 팔로군 산둥군구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일련의 공세 작전을 펼쳤다. 1945년 8월, 뤄룽환은 산둥군구에 병력을 다섯 노선으로 나누어 대대적인 반격을 펼침으로써 전국 인민들과 함께 항일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유일’한 근거지
항일전쟁에서 산둥 당 조직과 그들이 이끈 항일 무장 세력은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략적 기지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적 후방 전장을 개척하고 항일 유격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신민주주의를 구축하여 전국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성을 주체로 한 산둥 항일 근거지를 만들었다. 또한 산둥은 중국 항일전쟁이 최종 승리를 거둘 당시 중국 공산당이 전면적으로 주도한 유일한 성이 되었다.
산둥 항일 근거지는 일본군과 괴뢰군을 물리치고 소멸시키는 중요한 전장일 뿐만 아니라, 화베이(華北)와 화중(華中) 근거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남쪽으로는 화중 항일전쟁 근거지의 개발을 지원하고, 서쪽으로는 허베이·산둥·허난(冀魯豫) 항일전쟁 근거지를 도왔으며, 산시·차하얼·허베이(晉察冀), 산시·허베이·산둥·허난(晉冀魯豫) 및 기타 항일전쟁 근거지들과 서로 협력하여 화베이의 적 후방 전장에서 항일전쟁의 형세를 함께 지원했다.
1945년 8월, 산둥 항일전쟁 근거지[진푸로(津浦路) 동쪽과 룽하이로(隴海路) 북쪽을 포함한 산둥성 대부분과 허베이와 장쑤(江蘇)의 일부]는 12.5만km²의 면적을 차지했으며, 인구는 2400만 명으로 그중 당원은 20만 명, 팔도군은 27만 명, 민병은 50만 명, 자위대는 150만 명에 달했다. 또한 공산당이 이끄는 첫 번째 성 정부가 수립되어 기본적으로 신민주주의 신산둥의 초기 형태를 이루어 많은 인민들이 주권자가 되었다. 유명한 공산당 역사 전문가인 진충지(金衝及)는 <산둥 항일전쟁 근거지의 독특한 역정>에서 “산둥 항일전쟁 근거지는 인구, 당원, 군대 수, 섬멸한 적의 수 등의 모든 측면에서 다른 항일전쟁 근거지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했다.
영원한 기념비를 세우다
항일전쟁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산둥의 군대와 인민들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팔로군 산둥 주력부대만 15.47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산둥 내 민간인 사상자는 600만 명 이상에 달했다. 3800만 산둥 사람들이 굳건히 버티며 끝까지 싸운 끝에 드높은 기세의 영웅 개선가를 울렸고 감동적인 영웅적 서사를 써 내려갔다.
위안쯔야(淵子崖) 전투에서는 팔로군 산둥종대 제2여 제5단과 현대대(縣大隊) 및 구중대(區中隊)의 40여 명의 간부들과 전사들이 영웅적으로 목숨을 바쳐 인민들을 지켰다. 다칭산(大青山) 전투에서는 300여 명의 용사들이 당 정부 기관과 군중들의 대피를 엄호하기 위해 완강히 저항하여 후퇴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또한 옌춘(閻村) 전투에서는 ‘폭파영웅’ 마리쉰(馬立訓)이 총탄을 맞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던져 일본군의 보루를 폭파함으로써 ‘인민 해방을 위해 싸우자’라는 맹세를 목숨으로 이행했다. 혁명의 선열들은 굽히지 않는 기개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총성 속에서도 민족의 희망을 지켰고 절망 속에서 승리의 길을 열었다.
산둥의 항일전쟁 역사를 돌아보면, 치루의 대지에 울려 퍼지는 ‘장삼(長衫)을 벗어 던지고 유격대에 합류하자’라는 호소에서부터 팔도군 제115사단과 산둥종대 등 항일 무장 세력이 함께 싸우는 것까지, 군화를 만들고 옷을 꿰매며 전선 지원의 중책을 짊어진 이멍(沂蒙) 훙싸오(紅嫂)들에서부터 지뢰전과 참새전과 같은 인민전쟁의 ‘광대한 바다’에이르기까지 산둥의 당·정부·군대·인민들은 장기적인 혁명 투쟁 속에서 ‘당군동심(黨群同心), 군민정심(軍民情深), 수유교융(水乳交融), 생사여공(生死與共)’이라는 이멍 정신을 함께 키워왔으며, 이는 치루의 대지에서 위대한 항일전쟁 정신의 구체적인 표현이 되었다.
위대한 항일전쟁의 정신은 치루의 대지에 영원히 퇴색되지 않는 정신적 기념비를 세웠다.
오늘날 위대한 항일전쟁의 정신은 역사를 초월하여 후세들을 격려하는 정신적 원천이 되었으며, 치루의 대지에 세워진 이 기념비 또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우리의 여정에서 도전에 맞서 용감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길을 밝혀줄 것이다.
【编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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