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샤오샤(陈晓霞): 공자와 유가학은 동서양 문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가?

From:중국 공자 넷Author: 2021-10-18 11:27

 공자는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이며 유가학설의 창시자이다. 공자는 후세사람들에게 공성인(孔聖人),지성선사(至聖先師), 만세사표(萬世師表)로 존경되고 있다.세계 각국에 일떠선 공자묘(子庙)는 공자제를 지내는 예제적인 건축물이며 그곳에서 전승되는 유가학 사상은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중국 공자묘와 유가사상의 전승

 첫 공자묘는 공자의 탄생지인 취푸궐리(曲阜阙里)에 세워졌다.‘사기· 공자세가(史记•孔子世家)’의 기재에 따르면 ‘공자의 거주지와 제자들의 방 등은 후에 사찰로 되었는데 그곳에 공자 생전에 사용한 의관(衣冠), 금(琴), 마차와 서적들이 있었다’라고 기재되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공자의 거주지는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사묘우(祭祀庙宇)로 되었다.

 한고조 12년(기원전 195년)10월 한고조 유방(刘邦)은 공자묘에 직접 찾아와 태뢰(太牢제사 때, 소·양·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것)로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는 제왕이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례가 된다. 한무제 때는 백가(百家)사상를 제치고 유가를 숭상하였으며 유가사상을 국가 통치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공자도 국립학교에서 받드는 성인으로 되었다. 그후 각 조대를 거치면서 공자묘는 부단히 늘어났으며 청조 때(清代)에 와서는 중국에 국자감(国子监),부학(府学),주학(州学),현학(县学),청학(厅学),향학(乡学)등 학교에 설치한 공자묘만 하여도 1740개나 되어 가장 널리 분포된 국가 제전묘우(祀典庙宇)로 되었다.  

 공자묘 건축물 구조와 형태에도 ‘예제(礼制)’, ‘중용(中庸)’, ‘대동(大同)’,‘천인합일(天人合一)’등 유가사상이 잘 구현되어 있다. 공자는 사회의 평형은 일정한 등급질서를 준수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사회가 평화롭고 질서가 있자면 예의제도로 사람들의 행위를 제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묘 건축물의 구조와 형태에는 주요 건축물과 부속건출물이 잘 어울려 돋보이고 있다. 또 공자묘 양측에 늘어 선 하마비(下马碑),엄격한 제사 순위에 따른 인물 배열, 대량의 제사용품 진열과 대성전(大成殿)건축의 부동한 규모 등에서 ‘예제’에 대한 사상이 충분히 체현되고 있다. 덕배천지방(德配天地坊)과 도관고금방(道冠古今坊)의 대칭구성, 예문(礼门)과 의로(义路)등의 대칭은 ‘중자천하지정도,용자천하지정리(中者天下之正道、庸者天下之定理)’의 중불편(中不偏), 용불역(庸不易)의 중용(中庸)사상과 ‘천하대통(天下大同)’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유가학은 ‘천인합일’을 주장하며 ‘사람-건축물-자연환경’의 화합을 추구하고 있다. 공자묘는 이러한 전통적인 정원 조합과 환경이 잘 어울러져있어 철리(哲理)를 표달하고 지혜를 일깨워주는 작용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공자묘의 건물과 환경속에서 깨닳음을 얻고 ‘성인(圣人)’의 사상적 경지를 깨닫게 된다.

 중국의 공자묘는 대부분 성(城) 안에 건설되어 있는데 보통 성 동남쪽에나 동쪽 혹은 동북쪽에 있다. 뿐만아니라 대부분 문묘(文庙)는 남쪽 성문 안쪽 동측 혹은 동문 안쪽 북측에 있다. 구체적인 건물 배치를 보면 전묘후학(前庙后学)과 좌묘우학(左庙右学), 우묘좌학(右庙左学), 묘학분리(庙学分离) 등 4가지 구조를 따르고 있다. 보통 대성문전(大成门前), 대성전전정(大成殿殿庭), 종성사 삼진정원(崇圣祠三进庭院)의 구조로 되어 있다. 공자를 모시는 문묘는 중국 국가 사전(祀典)에 올라 있으며 공자묘에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인물들도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아시아 국가의 공자묘와 유가사상의 전승

 공자묘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세계로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 주요한 대상국은 조선반도와 베트남이다. 조선반도에서는 소림수왕 2년(372년) 6월에 ‘태학을 세워 가르치자’고 하며 중국을 본받아 묘학합일(庙学合一)을 실현한 최고의 학부인 태학을 설립하였다. 1398년에는 한성에 공묘(성균관)을 설립하였으며 신라 성덕왕 16년(717년)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의 상을 만들어 태학에 세워놓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공자의 사상은 점차 조선반도에 인입되어 봉건사회 통치사상으로 자리잡았다. 통계에 따르면 조선반도 역사상 362개의 예제성공자묘(礼制性孔庙제왕이 제사를 지냈던 공자묘) 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공자묘는 소부분이 성내(城内)에 있었고 대다수는 성 밖의 산기슭에 있었다.

 베트남 학교의 공자묘는 보통 성내에 있었지만 일부분은 성 밖에 있는 것도 있다. 베트남 ‘대월사기전수(大越史记全书)’권3(卷3)의 기재에 따르면 베트남 리왕조 신무2년(1070년)에 수도에 ‘문묘를 건설하고 공자상과 주공 및 사배상(四配像 염구,언언,전손사와 주희의 상)을 세웠으며  72개의 성인의 화상을 그려놓고 사계절 제사를 지냈’을 뿐만아니라 독립후 첫 공자묘를 세웠다고 한다. 1076년 리왕조 황제는 하네이에 국자감과 문묘를 세우고 공자제를 지냈다. 첫 공자묘가 베트남에 세워진 후 빠른 속도로 베트남 전국 각지로 전파되었는데 통계에 따르면 베트남 역사상 공자묘 수자는 160개나 되었다고 하였다. 

 수당시기 공자묘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서한과 동한 시기 유교경전 ‘논어’는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대보원년(大宝元年701년)부터 공자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공자제를 일본국가사전(祀典)에 기록하고 중국 당나라 조례제를 본따 천황의 명의로 제사를 지냈으며 대학두(大学头), 대학조(大学助), 박사(博士)등을 두어 삼선(三献)을 맡게 하였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에서 유가학을 성교(圣教)로 신봉하며 학교내에 대폭적으로 공자묘를 설립하게 하였다. 통계에 따르면 일본 역사상 100여 개의 공자묘가 있었다고 한다. 통치자들의 요구에 따라 일본에서는 사람마다 유가학을 공부하는 사회풍기가 형성되었다. 

 일본 ‘영집해(令集解)’권15의 기재에 의하면 ‘학령’에는 명백히 ‘대학, 국학이라면 매년 봄가을의 두 중지월(春秋二仲之月봄과 가을 두절기가 시작되는 두번째 달)상정일(上丁)에 공자의 제를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번교(藩校일본 지방 봉건주의 영지에 세워진 학교)의 공자묘는 일부는 성 내에 있었지만 대부분은 성 밖에 있었다.

 15세기초엽 정하(郑和)가 몇차례에 거쳐 서쪽 바다로 나가면서 중국은 바다길에 대한 금지를 풀었다. 따라서 동남아 쪽으로 나가서 생계를 유지하는 남쪽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현상들이 많아지면서 공자묘 등 건축물도 더 많은 동남아 국가로 전파되었고 공자의 사상도 널리 알려져 당지 문명에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1899년 인도네시아의 화인(华人)들이 화문학교(华文学校)에서 공자상을 모시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인도네시아 유가협회도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 100여 개의 분회를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자제를 지내기 위해 건설된 건축물도 100여 개에 달하게 되었다. 

 1819년 말레이시아 페낭에 말라카 삼보묘서원(马六甲三保庙书院)이 세워졌다. 그 뒤로 각 도시에 유교협회를 두었으며 공성당(孔圣堂)등 공자제를 지내기 위한 건축물도 세웠다. 싱가포르는 1914년 실덕력유교협회(实得力孔教会)를 설립한 이래 공자의 교육사상과 도덕문화를 널리 알리고 진흥시켰으며 만국이 화목하면 태평하다는 것에 동감을 표하고 격치(格致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확실히 함)를 비롯한 각종 학문을 연구하고 선행을 도모하였다.

 구미국가의 공자묘 및 유가사상의 전파

 6세기 공자묘는 구미국가로 전파되었다.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는 최초로 중국의 사상과 유가문화를 유럽에 전파한 사람이다. 백과전서 학파의 대표학자인 돌바크(1723-1789)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공자의 정치주장을 추앙하였으며 중농학파 프랑수아 케네(1694-1774)는 유교학 중의 중농주장을 받들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1694-1778)는 중국의 정치와 철학, 도덕, 과학은 완벽하다고 보았으며‘우리가 중국사람처럼 할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고 하면서 프랑스도 유가학으로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19세기 영국의 선도사 이아각(본명James Legge)은 중국에 머무는 20여 년동안 ‘사서(四书)’, ‘주역(周易)’, ‘상서(尚书)’, ‘시경(诗经)’, ‘예기(礼记)’, ‘좌전(左传)’등 고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아각 선도사는 ‘공자는 고대 저작사적(著作事迹)의 보존자이고 중국 황금시대 잠언(箴言)을 주해한 사람이자 해석한 사람이다. …그는 최고의 신분으로 인류의 제일 아름다운 이상을 대표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국에는 켄트공작이 유럼 최초이자 유일한 공자묘를 세웠다. 

 20세기 90년대 독일 쾰른 근처의 차이나 타운에 공자동상이 세워졌다. 19세기 말 독일 선도사 화지안(본명 Ernst Faber)은 유교사상 중의 일부 윤리관념은 ‘예수기독교 도리와 출발점이 같고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하며 인(仁), 의(义), 예(礼), 지(智), 신(信) 등 윤리관념을 기독교 관념과 결합하여 선교하였다. 

 19세기부터 공자묘는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1883년 중국에 온 미국 선교사 이가백(본명 Gilbert Reid)은 유가사상은 백성을 가르치는 근본이라고 하면서 추앙하였다. 그는 ‘공자사상은 만고불변의 도리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적합한 사상이다’고 하였다. 1965년 캘리포니아 주도 새크라멘토에 공자묘가 세워졌고 20세기 70년대 이후 공자상은 선후로 뉴욕, 로스앤젤레스, 호놀룰루 등 도시에 세워졌다. 198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공자탄신기념행사를 개최한 후 해마다 공자탄신일이 되면 성대한 공자제전을 진행하였다. 이 행사에는 많은 화인(华人)들과 미국정계에서 참가하였다.

 독일 선교사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helm1873-1930)은 공자사상과 서양사상을 비교한 후 공자사상은 많은 우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가 공교대학(孔教大学) 개학 강경회(讲经会)에서 한 ‘유교는 대동(大同)을 실현할 수 있다.’라는 연설에서 ‘경제학설이나 사회학설 같은 것은 유교보다 못하다. 사양나라는 애국만 알고있지 나라 안의 백성이나 나라 밖의 천하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유교만이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금후 유교의 중하지도(中和之道)만이 대동을 이룰수 있다. 그 이유는 유교의 중하지도는 각 종교의 문호주노(门户主奴)의 관점을 지니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 교리는 나날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미국 선교사 새뮤얼 웰스 윌리엄스(Samuel Wells Williams)는 ‘중국총론(中国总论)’에서 ‘공자의 저작은 희랍과 로마 철학자의 훈언(训言)과 비교할 때 취지가 양호하며 그 사상을 사용한 사회와 그 우월한 실용성을 살펴볼때 공자는 이미 서양 철학자들을 능가하였다. ’고 하였다. 

 프랑스에서 제정한 ‘인권과 공민권 선언’에는 공자의 격언을 사용하여 자유의 도덕 한계를 묘사하였다. ‘자유는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조건 하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며 그 원칙은 자연적이고 정의로우며 그 보장이 되는 것은 법률이고 그 도덕적 한계는 아래 격언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강요하지 마라 ’

 양환잉(杨焕英)의 ‘공자사상의 국외전파와 영향’이라는 저서에는 1945년 미국 국무원 장관 에드워드 라일리 스테티니우스가 방송에서 한 ‘앞으로의 세계 평화를 처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지난 번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인류의 도덕을 발양하고, 선인의 도덕 정신을 주입하여야 하는데 이 도덕은 반드시 중국 공자의 도덕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 상의 많은 국가들이 유가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 많은 국가들도 유가문명정신을 자신의 국가발전 속에 도입하였다. 공자묘는 유가학설 전파의 중요한 플랫폼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부분적 국가들의 문명발전뿐만 아니라 서양사상가들에게도 적극적이고 거대한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쳤다.

 유가학설은 중국 전통문화의 주요한 구성부분일 뿐만 아니라 세계문화의 보물이다. 1988년 많은 노벨수상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였는데 그중 어떤 학자가 인류가 21세기에서 생존해 나가려면 반드시 2,500년 전의 공자시대에 돌아가 지혜를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가 후세들에게 남겨놓은 지헤는 현 인류사회가 마주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가사상은 중국의 것만이 아닌 전 세계 인류의 것이다. 

편집:高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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