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한국에서 천 년 가까이 사랑받다
2026-11-06 16:20:22 来源:금교
중국에서 소동파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름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한국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8월 25일, ‘소동파를 만나다·쓰촨의 멋, 차와 정취’ 문화 체험 행사가 한국 제주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는 동파 문화와 파촉(巴蜀) 문화를 결합하고 VR·AI·XR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한국 참가자들이 중국 송(宋)나라의 대문호 소동파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인들이 소동파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백 년 전부터 소동파는 이미 한반도의 문화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고려 문단을 휩쓴‘소동파 열풍’
소동파(1037~1101)가 한국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르다. 그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였기 때문이다.
송나라 희녕(熙寧) 연간(1068~1077), 고려 사신들이 빈번하게 송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관료 소송(蘇頌)의 시의 주석에는 “재작년(1077) 고려 사신이 여항(余杭)을 지나면서 자첨(子瞻, 소동파의 자)의 문집을 구해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소동파는 아직 생존해 있었으며 그의 문집은 이미 고려 사신들이 일부러 구해 갈 정도로 한반도에 널리 전해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꽤 흥미로운 일화도 하나 전해진다. 원풍(元豐) 3년(1080), 고려 문신 김근(金覲)은 유홍(柳洪), 박인량(朴寅亮)과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소동파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과 넓은 도량을 깊이 흠모하게 되었다. 귀국한 뒤 그는 두 아들의 이름을 각각 ‘부식(富軾)’과 ‘부철(富轍)’로 지었다. 훗날 김부식과 김부철은 모두 고려 문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문인이 되었으며, 특히 김부식은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편찬을 주도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고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문단에는 ‘동파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당시 문단의 거두였던 이규보는 <전주목 신조 동파문집 발미(全州牧新雕東坡文集跋尾)>에서 “사대부부터 신진 문인과 후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문집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라고 썼다. 조정의 사대부부터 신진 문인과 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동파의 문집을 손에 들고 아침저녁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소동파에 대한 사랑은 전란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사료에 따르면 몽골의 고려 침입 당시 소동파 문집은 불행히도 몽골군에게 불태워졌다. 소동파의 문맥을 이어가기 위해 전주목사는 특별히 명을 내려 다시 판각해 간행하도록 했고, 이로써 소동파의 시문은 다시 세상에 전해질 수 있었다.
고려 문인들의 소동파에 대한 추앙은 단순히 그의 작품을 읽고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 창작에서도 그를 본받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 문단에서는 소동파 시의 소재와 정취, 구성과 문장 표현을 앞다퉈 차용했으며, 소동파의 시문을 차운(次韻, 운자와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 짓는 것)하거나 화운(和韻, 화답하여 같은 운을 사용하는 것)한 작품도 잇따라 등장했다. 한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화도시(和陶詩)’를 지은 이인로의 작품에도 소동파의 작법을 본뜬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고려의 시론가 최자는 <보한집(補閑集)>에서 그의 시를 평가하며 “혹은 일곱 자나 다섯 자의 구절이 소동파 문집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규보는 당시 문단의 모습을 두고 “해마다 과거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면 사람들은 올해도 또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고 생각했다”고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도 했다. 이 짧은 한마디에 소동파의 시를 깊이 공부하고 그의 문풍을 본받으려 했던 당시 선비들의 열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를 통해 고려 문단에서 소동파 문풍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700년에 걸친 낭만: 한강을 적벽으로 삼고 동파의 풍류를 좇다
소식이 황주(黃州)로 유배됐을 당시 지은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는 조선 문인들이 거듭 읽고 연구한 고전이었다. 조선 초기 문학평론가 서거정은 “적벽의 한 편 글이 만고의 풍류를 남겼다(赤壁一賦,萬古風流)”는 말로 두 작품을 극찬하며 조선 문인들이 이 두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줬다.
이들은 소동파의 자유롭고 호방하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기개를 동경했고, 이를 계기로 수백 년에 걸친 모방이 시작됐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의 강을 적벽으로 삼고, 스스로를 소동파에 빗대며 달 밝은 밤 배를 띄워 시를 읊었다.
시공간을 넘어 소동파의 적벽 유람을 재현하는 이러한 전통은 고려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96년, 이규보는 전란을 피해 상주로 왔다. 그는 당시 소동파의 적벽 유람을 본떠 친구들과 함께 낙강에 배를 띄우고 시회를 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모방은 더욱 의식적인 형태를 띠었다. 1462년 가을 어느 날 밤, 서거정은 친구들과 한강에 배를 띄우고 “임술년 가을 칠월 보름, 광진 나루터에서 옛 현인의 적벽 유람을 이어가고자 한다(壬秋七望廣津頭,擬續前賢赤壁遊)”는 뜻의 시구를 남겼다.
이러한 일을 진정으로 극치에 이르게 한 것은 1502년이었다. 이 해는 마침 임술년으로, 소동파가 배를 타고 적벽을 유람했던 1082년 임술년과 정확히 7갑자(甲子), 즉 420년의 간격을 두고 있었다. 조선 문인 박은, 이행, 남곤은 특별히 칠월 기망일과 시월 망일에 잠두봉 아래에서 두 차례 배를 띄웠다. 이 두 날짜는 소동파의 <전적벽부>에 나오는 “임술년 가을, 칠월 기망”과 <후적벽부>의 “그해 시월의 망일”에 정확히 대응한다. 평소 소동파의 적벽 뱃놀이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이들은 소동파의 초탈한 풍모를 본받기 위해 이 일을 행했다. 배 위에서는 이들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많은 시를 지었다. 훗날 남곤은 이 시들을 정리해 <잠두록(蠶頭錄)>으로 엮었다.
이들은 “한강을 적벽으로 삼고 임술년을 경진년이라 한들 어떠랴”라는 뜻의 시구를 남겼으며 한강을 적벽으로, 그해를 소동파가 적벽을 유람했던 해로 삼은 것이다. 소동파가 글로 남긴 적벽은 천 리 밖에 있었지만, 조선 문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강에서도 또 하나의 ‘적벽’을 찾아냈다. 심지어 자신을 ‘동파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역사와 문헌 속 적벽의 공간을 조선의 현실 속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이는 일시적인 흥취에서 비롯된 우연한 행위가 아니었다. “한강을 적벽으로 삼고자 한다”는 내용의 시구 역시 한 편의 작품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1196년 이규보가 낙강에 처음 배를 띄운 때부터 1862년 마지막으로 기록된 적벽 뱃놀이까지, 이러한 전통은 약 700년 동안 이어졌다. 상주에서만 무려 51차례의 시회가 열렸다.
554편의 논문과 한 접시의 동파육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인들이 소동파를 연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더 이상 시를 읽고, 배를 띄우고, 그의 문장을 본받는 데 머물지 않고 소동파를 학문적 연구 체계 안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한국 학자들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까지 한국에서 소동파를 주제로 발표된 연구는 총 554편에 이른다. 한자문화 보급에 힘쓰고 있는 한국 단국대학교 안희진 교수는 40여 년간 소동파를 연구해 왔으며, 한국 학자 유종목은 한글판 <소식 시집>의 번역을 완성했다. 한국 학자 조규백은 <한국에서의 蘇東坡 關聯 研究論著目錄(1945~2019)>을 정리·발표해 70여 년간의 연구 성과를 하나하나 수록했다.
학술이라는 전문적인 영역을 벗어나 보면 소동파는 이미 서재를 나와 한국 대중의 일상적인 삶 속에 녹아들었다. 소동파는 황주로 유배됐을 당시 “불은 약하게 하고, 물은 적게 넣으며, 불의 세기가 충분해지면 저절로 맛있어진다”는 말로 동파육을 만드는 비법을 남겼고, 이 평범한 가정식 요리는 천 년 동안 전해지며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 서울의 여러 중식당에서도 동파육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대표적인 메뉴다.
대중문화에서도 소동파는 빠지지 않는다. 한국 EBS의 인기 프로그램 <세계테마기행>은 소동파를 주제로 한 특집을 제작했다. <적벽부>는 한국에서 단가, 송서 등의 음악 형식으로도 전해지고 있으며, KBS 라디오에서는 안숙선이 부른 단가 버전이 방송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동파 문화의 한국 내 확산은 계속되고 있다. 올해 5월에는 인천시립박물관이 ‘소동파 관련 강좌(중국 고전의 향기: 소동파의 유쾌한 삶과 문학)’를 제28기 박물관대학 상반기 과정의 첫 번째 강좌로 마련했다. 한 명의 중국 문인이 한국의 공립박물관의 새 학기 첫 강좌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한중수묵단청교류협회 상백 회장이 말했듯이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대체로 중국에 소동파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소동파의 이야기는 송나라에만 속한 것도 아니고, 중국에만 속한 것도 아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정신에는 본래 국경이 없는 것이다.
편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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