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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한 구간을 통해 5000년 중국 문명의 심장 박동을 느끼다

2026-03-20 11:15:26 来源:금교

다밍후(大明湖)에서 배를 띄워 노를 천천히 저을 때, 혹시 이 순간 노 아래에 4200년 전의 고대 성벽이 조용히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지난(濟南)시 지하철 6호선 공사가 진행되던 중 다밍후 남서쪽에서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용산(龍山)문화 성벽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발견으로 지난 도심의 도시 형성 시기는 단번에 지금으로부터 약 4200년 전인 용산문화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이는 현대 도시 중심지의 형성 시기를 기준으로 할 때, 지난시가 전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도시로 평가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토된 자료에 따르면, 해당 유적지의 지층은 아래에서 위로 순차적으로 대문구(大汶口)문화 중후기, 용산문화, 악석(嶽石)문화, 상(商)나라, 주(周)나라, 한(漢)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를 거쳐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清)나라와 근현대까지 층층이 이어져 있어 지난시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문명의 흔적을 고스란히 증명해준다.

왜 다밍후인가?

다밍후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이곳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다밍후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북위(北魏) 시대 지리학자 이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에 등장한다. 이도원은 “그 물[낙수(濼水)]은 북쪽으로 다밍후가 되고, 서쪽에는 대명사(大明寺)가 있으며, 사찰의 동쪽과 북쪽이 호숫가에 인접해 있어 이 물이 곧 맑은 호수를 이룬다.”라고 기록했다.

당시의 다밍후는 사실 지금의 우룽탄(五龍潭)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이름 또한 대명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남쪽으로는 관영호(灌纓湖), 북쪽으로는 작산호(鵲山湖)와 이어질 만큼 범위가 매우 넓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호수는 당시에는 ‘역수피(歷水陂)’라고 불렸으며, 낙수와 역수가 합류하여 형성된 천연 습지에 가까웠다. 그 규모 또한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시간을 4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 사회 구조는 점차 복잡해지고 인구는 증가했으며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어 집단 간 충돌이 빈번해졌다. 이에 선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고 참호(塹壕)를 파는 등 방어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고고학 발굴 결과, 확인된 이 용산문화 성벽은 너비가 약 28미터, 잔존 높이가 6.4미터에 달하며, 흙을 다져 쌓는 방식으로 축조된 것이었다. 성벽 서쪽의 참호의 너비는 50미터를 넘고, 가장 깊은 곳은 지표면으로부터 약 9.8미터에 이른다. 이는 선민들이 매우 지혜로웠음을 보여준다. 흙을 무턱대고 쌓은 것이 아니라, 인근의 자연 하천을 활용해 성곽 방어용 도랑을 정비하고, 그 과정에서 파낸 흙을 성벽을 다져 쌓는 데 사용했다. 그 결과 성벽은 더욱 견고해졌고, 성벽 방어용 도랑도 천연의 방어선이 되어 하나의 완전한 성곽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이곳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고학자들은 유적지에서 악석문화부터 전국(戰國)시대에 이르기까지 성벽을 덧쌓고 보수한 흔적을 발견했다. 시대를 거듭하며 이어진 성곽 축조, 수로 개착, 물길 변경은 이 일대의 지형과 수계를 끊임없이 형성해 왔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용산문화 시기 이곳은 하천과 고인 물이 어우러진 저습지였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평지로 변해 인간이 거주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됐다. 이후 금(金)나라와 원나라 시기에는 다시 토사가 쌓이며 호수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다밍후의 원형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진주천(珍珠泉), 부용천(芙蓉泉), 효감천(孝感泉) 등 20여 곳의 샘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호수의 중요한 수원(水源)이 되었고, 이들이 어우러져 오늘날 다밍후의 수역 구조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다밍후’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확립된 것은 금나라 시대 문인 원호문(元好問)의 <제남행기(濟南行記)>에서이며, 그 이후로 이 이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4200년 전, 선민들은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이곳을 선택하여 삶을 터전으로 삼아 성을 쌓고 정착했다.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지형은 서서히 변했고, 인공적으로 끊임없이 물길을 다스리고 바꾸면서 수역은 점차 확대되고 변모해 마침내 고대 성벽은 이 푸른 물결 아래 고요히 잠들게 되었다.

왜 지난인가?

선민들이 성을 쌓은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살아 남기 위해서였다. 수자원 조건을 보면, 지난은 태산(泰山) 북쪽 기슭의 석회암 지형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하 대수층이 풍부하고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지하수가 지질의 압력을 받아 암반의 균열을 따라 솟아나와 풍부한 수자원을 형성한다.

지난시 고고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해당 유적지에서는 용산문화 시기부터 전국시대, 당나라,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조성된 13개의 우물이 밀집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선민들이 일찍부터 우물 굴착 기술을 습득하여 더 이상 강수에만 의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지하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난은 고대 ‘사독(四渎, 천하의 4대의 강)’ 중 하나인 제수(濟水)와 인접해 있다. 이 큰 강은 북부의 중요한 천연 하천으로서 수자원을 보충하는 동시에 비옥한 충적토를 형성하여 농업 재배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물이 있어도 발전이 필요하다. 지난은 지리적 위치 또한 뛰어났다. 동쪽으로는 용산문화의 핵심 유적인 장추(章丘) 성자애(城子崖) 유적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루시(魯西) 평원으로 통한다. 남쪽으로는 태산의 지맥을 따라 산둥성 중부 산악지대로 깊숙이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고대 제수를 통해 화베이(華北) 평원과 맞닿는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문명 교류를 촉진했고, 지난이 주변의 인력과 물자를 집결해 대규모 성곽 축조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의 천년에 걸친 문명의 토대다. 고고학적 발견들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서로 맞물려, 지난의 끊임없는 문명의 계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도심 인근 장마툰(張馬屯)에서는 9000년 전 지난 지역의 가장 이른 인류 활동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장추 교가(焦家) 유적에서는 5000여 년 전 산둥성 북부 지역 최대 규모의 대문구문화 취락이 출토되었으며, 동시에 해대(海岱, 지금의 발해와 황해에서 태산에 이르는 지역) 지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시기의 성터로 평가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여 년 전의 장추 성자애 유적은 중화 문명의 토착적 기원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며, 용산문화의 찬란함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또한 역성(歷城) 대신장(大辛莊) 유적에서 확인된 3000여 년 전 대형 상나라 읍락은 해대 지역에서 상나라와 이(夷, 그 당시 동남부의 민족)가 융합된 역사적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왜 산둥인가?

약 8000여 년 전의 후이(後李)문화 시기, 선민들은 이곳에 정착해 농사법을 익히며, 반지하식 집에서 살고 토기(陶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방을 떠돌던 생활을 끝내고 인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방식인 ‘정착’을 시작한 것이다.

북신(北辛) 문화 시기에는 농업 기술이 크게 발전했다. 선민들은 가뭄에 강한 조나 기장 같은 곡물을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석괭이, 석낫, 석제 맷돌 등 보다 전문적인 농기구를 사용하였다. 이는 이후 대문구문화와 용산문화의 번영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대문구 문화 시기에는 사회 내부에 뚜렷한 빈부 격차가 나타났다. 어떤 무덤에는 정교한 예기가 있었고 어떤 무덤에는 한두 점의 초라한 도기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 계급과 의례의 초기 형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이미 초기 성터가 나타났으며, 성곽을 쌓는 데 필요한 기술과 조직 능력이 이미 준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용산문화 시기에 이르면, 앞선 수천 년간 축적된 기술과 인구 기반,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대규모 성곽 건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용산문화 시기의 찬란함은 산둥 선사 문화가 끊임없이 도전을 극복하며 단계적으로 발전해 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술과 여건이 성숙해지자 용산문화 시기의 산둥은 첫 번째 성곽 축조의 붐을 맞이하게 되었다. 추평 정공(鄒平丁公), 임치 동림(臨淄桐林), 수광 변선왕(壽光邊線王), 양곡 경양강(陽穀景陽岡), 오련 단토(五蓮丹土), 일조 양성진(日照兩城鎮) 등 고대 국가들이 즐비한 풍경이 고고학 발굴을 통해 점차 드러났다. 현재까지 산둥과 주변 해대 문화권에서 20여 개의 용산 유적지가 확인되었으며 그 규모는 각각 다르지만 방어 체계는 이미 상당히 성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자가 말했듯이, “성곽과 해자(垓池, moat)가 굳건함을 이룬다”는 것은 이러한 성벽의 등장이 재화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높은 성벽과 깊은 해자가 필요했던 시대, 즉,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한 구간의 성벽은 지난의 도시 형성 역사를 1500년 앞당겼고, 한 호수는 문명의 요람으로서 산둥의 깊은 역사적 축적을 비추었다. 또한 한 번도 끊긴 적 없는 문명의 탄력성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에도 5000년 전 선민들과 마주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느낄 수 있다.

【编辑:董丽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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